이집트 여행기 3일차(1편) - 올드카이로여행, 이집트 전철타기, 이집트 성 마리아 교회 Saint Mary Church, 바빌론의 성채

2020. 7. 14. 08:54해외여행

이집트 카이로 여행의 마지막날. 

 

오후비행편이라서 짐을 싸놓고 공항까지 갈 드라이버 예약을 마치고

 

마지막 오전시간은 올드카이로를 구경하러 나갔다. 

 

첫날 지나친 카이로 전철을 타고 올드카이로 구역으로 향했는데, 

 

국민학교 다닐 때 타던 우리나라 1호선 경인선과 참 비슷했다. 

 

이집트 전철 티켓오피스
추억의 표 넣는 기계
육교를 건너간다.
여성전용 탑승칸이 있다.
이집트 전철 여성전용칸
이집트 전철 표

 

 

이집트 전철은 옛날 우리나라 전철의 향수를 불러 일으킬 만큼 모든 것이 비슷했다. 

 

표를 파는 창구부터해서 표를 넣고 들어가는 개찰구, 그리고 표까지 모든게 비슷하다. 

 

카이로 전철 요금은 구간상관없이, 1정거장을 가든지 종점까지 가던지 동일하게 150원이다.

 

보통 그 나라 물가를 교통비로 가늠한다고 했는데 교통비도 정말 저렴했다. 

 

 

이집트는 90%의 사람들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는 이슬람문화 중심의 나라답게 

 

전철도 여성전용 탑승칸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신기했다. 

 

히잡을 입은 여자들은 전용 구역에서 대기를하다가 열차가 오면 탑승을 한다.

 

그래서인지 일반 탑승칸에는 남자들 밖에 없는 것도 참 신기했다.

 

이집트 콥트교회
이집트 콥트 정교회
성모마리아 타일 모자이크
Saint Mary church - famous of the hanging church
Saint Mary church - famous of the haning church
Saint Mary church - famous of the haning church 내부

 

 

콥트(copt)는 이집트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용어로, AD 40년 사도 마가의 선교로 시작된 교회가 그 시초다.

 

콥트교회는 4세기부터 사막 교부들을 배출했고 초기 수도원운동을 이끌었다.

 

콥트교회의 정식 명칭은 콥트정교회(Coptic Orthodox Church)로, 2000년 기독교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7세기 이집트의 이슬람화 후에도 굴하지 않고 독특한 신앙 전통을 지키며 세계 교회의 한 분파로 자리하고 있다.

 

근래에는 기적과 성령의 역사를 중시하면서 개신교회와도 적극 교류하고 있다.

 

 

이집트 인구의 약 100~20%가 콥트 기독교인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콥트교는 전통적 고대 교회라 할 수 있는데, 초기 기독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따른다.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을 믿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정확무오하다고 믿으며

 

초기 교부들의 해석을 따른다. 325년 확립된 니케아신조를 따른다.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한 교부 아타나시우스는 콥트인이었다.

 

예배의식을 중시하며 성화(聖畵)로 불리는 ‘이콘’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더 풍성하게 추구한다고 한다.

 

Saint Mary church - famous of the haning church 성모마리아
Saint Mary church - famous of the haning church 내부
바빌론의 성채

 

 

바빌론 성채의 최초의 건축은 아마도 이집트의 26왕조의 느고왕(기원전 605~593년)이 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현재의 자리에 세워 졌고, 여기에 AD 98년에 로마의 트라얀 황제가

 

비잔틴 양식을 덧붙여 개축하였다. 돌과 벽돌을 쌓아 올리는 방식은 지극히 로마식이다.

 

AD 395년 아르카디우스가 재건한 나일강 위의 성채이다. 망대 사이의 입구는 수문이며, 발굴의 결과

 

현재의 지표면보다 6m가 낮은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이 지역 (현지명 : old cairo)을 아주 오래 전부터 바벨론이라고 부르고 있는가?

 

이와 관련한 설들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13세기 초 람세스 2세 (BC 1290 ~ 1224) 에게 붙잡혀 왔던

 

페르시아인들이 람세스 2세를 대항하여 멤피스 방향의 하빈 시타델을 점령하고 항전하자 람세스 2세가

 

이들에게 자유와 안전을 보장한 다음에 이들이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고국의 수도를 그리워 하며

 

'바벨론'이라 이름지었다. 이것은 마치 미국의 차이나타운, 코리아 타운이 형성되는 것과도 흡사하다.

 

바빌론 요새설명

 

 

26왕조의 느고 2세가 (BC 609 ~593) 나일강과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 건설이 시작하여

 

27왕조 (페르시아 왕조 : BC 525 ~ 338)를 거쳐 다이우스 1세때 완성되었다.

 

이 수로공사를 위하여 바빌로니아의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잡혀온 이들이 그들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이름을 바벨론이라고 불렀다고한다. 

 

바빌론 성채를 구경하고, 콥틱박물관으로 향한다. 

 

이집트 여행이 얼마 남지 않아 매우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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