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크라쿠프 여행기 - 아우슈비츠 수용소

2021. 3. 22. 08:52해외여행

안녕하세요 찐 여행자입니다.

 

보통 2006년 이 시절에 서유럽 1달 여행한다고 하면 폴란드는 루트에 끼워넣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볼거리가 있는것도 아니고 동선과 너무 벗어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치안 문제도 있긴 합니다.)

 

그렇지만 아우슈비츠라는 너무 거대한 요소가 저를 폴란드로 이끌게 되었고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것을 좋아하는 제가 루트 동선을 비효율적으로 만들면서까지

 

이 곳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로 오게 되었습니다.

 

프라하에서 거의 반나절을 달려 기차를 환승해서 달려온 크라쿠프에서 첫 날은 바로 잠이들고

 

두번 째 날 아침이 되자마자 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향했습니다.

 

수용소 앞의 작은 정원
수용소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매표소와 입구
너무도 유명한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입간판

 

 

우선 폴란드에 넘어오는 기차에서 옛 소련 스타일의 제복을 입은 공무원이 큰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며

 

다가와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고, 여권과 제 얼굴을 한참을 번갈아 보더니 드디어 원하던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폴란드 크라쿠프에 도착하니 아시아사람은 아예 찾아볼수도 없고,

 

서유럽에 있던 흑인이나 인도/파키스탄 계열의 사람들도 없이 오로지 백인들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자유로운 서유럽에 비해서는 약간 차가운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여행한 프라쿠프는 17세기 초, 바르샤바가 새로운 수도로 정해지기 전까지 폴란드의 수도였던 곳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이 도시로부터 50Km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오슈비엥침이라는 곳을 향하는 버스를 타면

 

크라쿠프 중앙역에서 약 1시간 반 뒤에 대부분의 관광객이 내리는 이곳에 같이 따라 내리면 됩니다.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는길
을씨년스러운 거리
전쟁의폐허
관광객들
쓸쓸한거리

 

 

입구에 걸려있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간판이 너무 먹먹하게 다가왔습니다.

 

차라리 노동을 하는게 수용생활을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뜻이니 말입니다.

 

실험실에서 실험을 당하거나 처형을 당하거나 굶어죽는것보다는 이 유대인 포로들에게는

 

노동하는 것이 이곳에서는 그나마 가장 인간답게 생존할 수 있는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2006년 당시 한국인 교수님이 폴란드에 계셨는지 입구에서는 다른나라에 거의 없었던 

 

한국어 해설 안내 책자가 있어서 굉장히 아우슈비츠를 둘러보는데 도움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세계2차 대전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독일이 침공하는 사진과 자료들도 이곳에 기록되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실제 서류
기념비와 꽃다발
안경만 남은 잔해
추모벽
실제 수용소 내부
추모의 벽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는 나치 제국이 건설한 수용소 중 가장 대규모의 수용소였습니다. 여기에는 세 군데의

 

주요 수용소가 있었는데, 이들 수용소는 모두 수감된 수감자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는 곳이었습니다.

 

이 중 한 군데는 집단 학살 수용소로서 나중까지 존재하기도 하였는데요. 이 수용소는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약 37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 하였는데, 전쟁 전 독일-폴란드 접경 지역인 북부 실레지아와 가까운 곳으로

 

1939년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하여 점령한 후 나치 독일 부속령이 된 지역입니다.

 

 

SS 부대는 오슈비엥침이라는 폴란드 도시 부근에 세 개의 주요 수용소를 설립하였는데,

 

1940년 5월에는 아우슈비츠 제1호가, 1942년 초에는 아우슈비츠 제2호(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가,

 

그리고 1942년 10월에는 아우슈비츠 제3호(아우슈비츠-모노비츠)가 세워졌습니다.

 

저때는 셔틀버스가 없었는데 지금은 수용간의 무료셔틀도 운행한다고 합니다.

 

역사적인 장소
27블록
수용소에 핀 꽃들
수용소 내부
쓸쓸한 수용소
의무대 였던 것 같다
철조망
전기가 흘렀다고 하는 철조망
화장터
화장 시설
화장했던 터

 

 

아우슈비츠로 수송된 유태인의 합계는 약 백십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SS와 경찰 당국은 약 200,000명의 다른 희생자들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하였는데, 이 중에는 140,000명에서

 

150,000에 달하는 비 유태계 폴란드인, 23,000명의 로마니와 신티(집시들), 15,000명의 소련 전쟁 포로

 

그리고 기타(소련인, 리투아니아인, 체첸인, 프랑스인, 오스트리아인, 이탈리아인 등) 25,000명도 포함됩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새로운 수감자들이 도착하면 가장 먼저 선발 과정을 거쳤다고 합니다.

 

 

SS 요원들은 강제 노동에 적합하지 못한 사람들을 먼저 선발하여 곧장 가스실로 보냈다고 하는데요.

 

가스실에는 가짜 샤워기가 달려 있어 희생자들을 속이기에 충분했습니다. 가스실로 보내진 사람들의 소지품은

 

몰수하여 “캐나다(Kanada, 또는 Canada)” 창고에서 분류한 후, 독일로 다시 수송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임을 당한 유태인의 수는 적어도 960,000명에 이르는데, 기타 희생자로는

 

약 74,000명의 폴란드인, 21,000명의 로마니(집시들) 그리고 15,000명의 소련 전쟁 포로와 10,000명에서

 

15,000명의 기타 국적 소지자(소련인, 체첸인, 유고슬라비아인, 프랑스인, 독일인, 오스트리아인)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감시 타워 같다
크라쿠프로 돌아가는 버스 시간표
왠지 쓸쓸한 곳

 

 

11월 중순인 비교적 겨울에 방문해서 그런지 나뭇잎도 하나도 없는 배경의 수용소가

 

그 당시의 아픈 기억을 데려와 저를 더욱더 적막하고 쓸쓸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만 크라쿠프로 돌아가는 버스 정류장 앞 친절했던 폴란드 아주머니의 친절했던 미소가 그나마 

 

도심으로 돌아가는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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